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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구석구석/생활 정치 경제

📌 1987년 6.10 민주항쟁: 불꽃처럼 타오른 시민의 힘 기념행사 정보

by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면 공감 하트가 생긴다 . 2025.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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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6월 민주항쟁: 불꽃처럼 타오른 시민의 힘 기념행사 정보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1987년 6월, 대한민국 전역에 울려 퍼진 외침


🔥 들어가며: 그날의 이야기

1987년 6월. 한국 역사상 가장 뜨겁고 역동적인 한 달이었다. 전두환의 철권통치 아래 숨죽여 살던 국민들이 드디어 거리로 나섰다. 단순한 시위가 아닌, 온 국민이 하나 된 거대한 항쟁이었다. 대학생부터 회사원까지, 주부부터 택시기사까지 모든 사람이 흰 손수건을 흔들며 경적을 울렸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 항쟁의 도화선: 두 젊은이의 죽음

박종철 -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19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21세)은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경찰은 수배 중인 선배의 행방을 캐려 했지만, 박종철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박종철은 물고문 중 숨을 거뒀다.
정부는 터무니없는 발표를 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21세 청년이 책상을 탁 친다고 죽을까? 부검 결과 온몸의 고문 흔적이 드러나며 정부의 거짓말이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이한열

- 꺼지지 않는 민주주의의 횃불

 

 
1987년 6월 9일, 6·10 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연세대에서 또 다른 비극이 벌어졌다. 몸살로 아팠지만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시위에 참가한 이한열(20세)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미국 기자가 촬영한 피투성이 이한열의 모습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는 7월 5일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죽음은 민주주의의 불씨가 되어 온 국민의 가슴에 타올랐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고(故) 이한열 열사(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의 27주기 추모제가 9일 연세대 백양로 삼거리에서 열렸다. 이한열 열사가 지난 1987년 6월 9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 항쟁의 물결: 6월 10일에서 29일까지

6월 10일 - 운명의 하루

 
 

 

이날은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가졌다:

  • 오전: 민정당이 노태우를 대선 후보로 지명 (독재의 연장)

  • 오후: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 시위 폭발

오후 6시 정각,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 택시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 시민들이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 버스 승객들이 구호를 외쳤다

하루 만에 3,800여 명이 연행되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명동성당 - 항쟁의 성지

600여 명의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계성여고 학생들은 도시락과 물을 날라다 주며 농성을 지원했다. 5일간의 명동성당 농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항쟁의 심장부가 되었다.

 

6월 18일 - "최루탄 추방의 날"

부산에서 이태춘 씨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국민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이날부터 시위는 학생 중심에서 시민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6월 26일 - "넥타이 부대"의 등장

평소 정치에 관심 없던 회사원들이 넥타이를 매고 거리로 나섰다. 34개 도시에서 130만 명이 참여한 "평화대행진"이었다. 이제 시위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 6·29 선언: 독재의 항복

연일 계속되는 시위에 정권은 흔들렸다. 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었고, 미국도 무력 진압을 반대했다.
1987년 6월 29일, 노태우는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6·29 민주화 선언 주요 내용

  1.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
  2. 김대중 사면 복권
  3. 언론 자유 보장
  4. 인권 신장
  5. 정치적 대화와 타협

20여 일간의 뜨거운 항쟁이 드디어 승리로 결실을 맺었다.
 

대한민국 최대의 살인마 노태우 전두환


🏆 항쟁의 성과와 의미

즉각적 성과

  • 1987년 10월: 직선제 개헌 국민투표 통과 (93.1% 찬성)
  •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직선제 선거 실시
  • 제6공화국 출범 -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 개막

역사적 의의

  • 400~500만 명 참여 -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민 항쟁
  • 비폭력 평화시위의 모범 사례
  • 시민사회의 성장과 민주주의 의식 확산
  •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 역할

영화 ‘1987’이 누적관객수 500만 명을 목전에 두며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1987년 당시 뜨거웠던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있던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과 배우 우현과 안내상에 대해 관심을 표하고 있다

 


🎯 2025년 6월 10일 기념행사 정보

📅 제38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행사

법정 기념일 지정: 2007년 5월 2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6.10 민주항쟁기념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
주관 기관: 행정안전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요 기념 장소들

🏛️ 명동성당 - 6월 민주항쟁 발생지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는 항쟁의 성지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 6·10 국민대회가 시작된 곳
🏛️ 연세대학교 - 이한열 열사 추모 공간
🏛️ 남영동 대공분실 - 현재 인권기념관으로 조성된 박종철 열사 고문 장소

기념 활동

  • 공식 기념식
  • 시민 추도 행사
  • 청소년 역사 교육 프로그램
  • 전국 각지 지역별 기념행사

💭 마무리: 그날의 정신을 이어가며

6월 민주항쟁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박종철과 이한열,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자유롭게 말하고, 투표하고,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
38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주의는 한 번 얻으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끊임없이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1987년 6월. 그리고 그날의 시민들을." 🕊️
그날의 함성이 오늘의 자유가 되었고, 오늘의 참여가 내일의 희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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