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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결정적 전투 5: 운명을 바꾼 치열한 혈전들

by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면 공감 하트가 생긴다 . 2025.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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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결정적 전투 5: 운명을 바꾼 치열한 혈전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3년 1개월간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 중에서도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기념비적인 전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춘천지구 전투 (1950년 6월 25일~28일)

개전 초기 유일한 승전

북한군의 기습 남침 이후 국군이 거둔 최초이자 유일한 승전이었습니다. 국군 제6사단이 춘천-홍천 지역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을 3일간 막아내며 적의 수도권 포위 기도를 분쇄했습니다.

전투 경과

  • 6월 25일 새벽: 북한군 제2사단이 춘천 공격 개시
  • 6월 25일 오전: 국군 제6사단 19연대 1대대가 소양강 방어선에서 저항
  • 6월 25일~28일: 춘천 시가지에서 치열한 방어전 전개
  • 6월 28일: 춘천 포기하되 북한군에게 막대한 피해 입힘

전투 의미
춘천전투는 북한군의 수도권 외곽 포위 계획을 완전히 무너뜨린 결정적 승리였습니다. 3일간의 지연전으로 서울 방어와 정부 피난에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으며, 국군의 뛰어난 전투 수행 능력을 입증한 쾌거였습니다.

 

국군 6사단이 춘천전투를 통해 북한군의 수도권 포위 기도를 분쇄하는 데는 포병의 기여도 컸다. 사진은 1950년대 M2 105㎜ 곡사포의 사격 훈련 장면. 6·25 개전 초반에는 이보다 더 화력이 떨어지는 M3 105㎜를 주로 사용했다. 국방일보 DB

 

북한군은 춘천 전투 때 Su-76 자주포를 투입하는 등 아군보다 우월한 화력을 자랑했으나 국군의 선전에 밀려 수도권 포위에 실패했다. 사진은 6·25전쟁 당시 아군에게 파괴된 북한군의 Su-76 자주포.

2. 다부동 전투 (1950년 8월 12일~10월 5일)

"동양의 베르댕" - 55일간의 혈전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일대에서 벌어진 55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대구 북방의 최후 방어선을 지켜낸 결정적 전투입니다.

전투 배경

  • 국군 제1사단이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 지역인 다부동 방어
  • 북한군 3개 사단(3, 13, 15사단)이 대구 점령을 위해 총공세
  • 김일성의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 명령 하에 벌어진 8월 공세

주요 전투 과정

  • 8월 12일: 국군 제1사단이 주저항선(Y선)으로 철수
  • 8월 15일: 북한군의 총공격으로 치열한 격전 시작
  • 8월~9월: 유학산, 수암산을 중심으로 한 고지쟁탈전
  • 9월 공세: 북한군의 재공격과 국군의 결사 방어

전투 결과

  • 피해 규모: 북한군 2만 4천여 명, 국군 1만여 명 사상
  • 전략적 의미: 북한군 공세종말점 도달, 대구-부산 생명선 보호
  • 백선엽 사단장: "매일 주저앉아 울고 싶을 정도의 피해"라고 회고
국가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최후의 저지선

 

다부동(多富洞) : 대구 북방 22km 대구와 최단거리로 방어선 붕괴시 대구사수 불가 30여 년만의 가뭄과 무더운 날씨(37℃) 비전투 손실과 기후에 적응되지 않은 미군에게 큰 타격

3.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전세를 뒤바꾼 기적의 작전

맥아더 장군의 대담한 구상으로 실행된 인천상륙작전은 밀리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전쟁사의 걸작입니다.

작전 개요

  • 참가 병력: 함정 206척, 유엔군 7만 5천여 명
  •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
  • 상륙 지점: 인천 월미도와 인천항

작전 특징

  • 조수간만의 차: 10m에 달하는 극한 조건
  • 기만작전: 군산 상륙설 유포로 북한군 혼란 유도
  • 보급선 차단: 북한군 후방 연결선 완전 차단

전투 성과

  • 9월 15일: 월미도 점령 후 인천 시가지 돌입
  • 9월 28일: 서울 수복 (전쟁 발발 95일 만)
  • 북한군 붕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10만여 명 후방 차단

역사적 의미
인천상륙작전은 단순한 전술적 승리를 넘어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꾼 전략적 대승이었습니다.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여 낙동강 전선을 무력화시키고,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5,000대 1의 세기의 도박이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의 말이다. 김일성의 6·25전쟁 침공 나흘 후인 6월 29일, 맥아더 원수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영등포 언덕에 섰다. 적이 점령한 서울 하늘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길에는 후퇴하는 국군과 피난민이 뒤섞여 아수라장이다.

 

 

이 강산,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20만 명의 국군, 5만5천 명의 미군, 1만 명의 UN군의 붉은 피가 스며있다. 뜨거운 그 희생으로 오늘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 우뚝 섰다.

4. 낙동강 방어선 전투 (1950년 8월 4일~9월 18일)

최후의 보루에서 벌인 6주간의 사투

한반도 남쪽 끝 140km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낸 결정적 방어전입니다.

방어선 구성

  • 서부: 마산-창녕-왜관 (미 제8군 담당)
  • 동부: 왜관-다부동-영천-포항 (국군 담당)
  • 총 연장: 240km (낙동강 160km + 산악지대 80km)

주요 전투 지역

  • 다부동: 대구 북방의 핵심 방어선
  • 왜관: 낙동강 도하 저지전
  • 포항: 동해안 방어선
  • 마산: 서남부 방어선

북한군의 공세

  • 8월 공세: "8월 15일 부산 점령" 목표의 총공격
  • 9월 공세: 야간 공격 위주의 재공세
  • 병력 투입: 11개 사단 약 10만 명

방어 성공 요인

  • 유엔 공군의 압도적 제공권
  • 부산항을 통한 안정적 보급
  • 국군과 유엔군의 결사적 방어 의지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40여일 만에 낙동강 이남 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이 북한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판단을 한다. 8월 1일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 지대를 잇는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낙동강 방어선’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이 바로 칠곡·왜관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동북쪽은 국군이, 서남쪽은 미군이 맡았다. 최후 배수의 진인 만큼 전투는 치열했다.

 

칠곡은 왜관뿐 아니라 다부동 전투와 가산전투 수암산전투 유학산전투 328고지전투 369고지전투 등 수많은 전투가 치러진 곳이다. 그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곳이 왜관 동북쪽 다부동이었다. 다부동은 대구로 가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이 뚫리면 대한민국은 공산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그해 8월 15일 부산에서 통일기념식을 갖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여의치 않자 이날을 ‘대구 점령의 날’로 정하고 총공세에 나섰다.

5. 장진호 전투 (1950년 11월 27일~12월 11일)

혹한 속의 처절한 철수작전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서 중국 인민지원군 12만 명에 포위된 미 해병대 2만 5천 명이 벌인 2주간의 처절한 돌파전입니다.

전투 배경

  • 북진: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 과정에서 발생
  • 중국군 개입: 28만 명의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
  • 포위망: 중공군 제9병단 7개 사단이 장진호 계곡에 포위망 형성

극한 조건

  • 기온: 영하 30~40도의 혹독한 추위
  • 지형: 장진호 주변 험준한 산악 지대
  • 보급: 공중 보급에만 의존하는 고립 상황

주요 전투 과정

  • 11월 27일: 중공군의 포위 공격 시작
  • 11월 28일~12월 3일: 유담리-하갈우리 돌파전
  • 12월 4일~7일: 고토리 집결과 재정비
  • 12월 11일: 함흥 지역 도달로 철수 완료

전투 결과

  • 미군 피해: 4천여 명 전사, 1만여 명 동상 등 부상
  • 중공군 피해: 5만여 명 사상 (추정)
  • 장비 손실: 대부분의 중화기와 차량 포기

역사적 평가
장진호 전투는 "패배 속의 승리"로 평가받습니다. 전투력을 보존한 채 포위망을 돌파한 것은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성공적 철수작전이었으며, 중공군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사진은 장진호에서 포위 당한 채 사투를 벌이고 있던 미 해병대원을 찍은 사진으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이것저것 몸을 감싸고 손에는 얼어붙은 깡통을 들고 있으나  '살아야 한다! '라는  의지에 찬 눈빛 이 인상적인 사진이다. 아래는 사진이 수록된 책인 'This is War!'에서 인용한 기록이다.

 


전투들이 남긴 교훈

이 다섯 전투는 각각 6·25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춘천전투는 개전 초기 국군의 저력을 보여주었고, 다부동 전투는 최후 방어선을 지켜내는 불굴의 의지를 입증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창의적 전략으로 전세를 역전시켰으며, 낙동강 방어선은 국제연합의 집단안보 체제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진호 전투는 극한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군인정신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75년이 지난 오늘, 이 전투들에서 보여준 용기와 희생은 여전히 우리에게 자유의 소중함과 평화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영웅들이 지킨 나라, 이어나갈 대한민국" - 6·25전쟁 제75주년 기념식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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