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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75주년 특집 시리즈 2편: 피와 눈물의 전장

by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면 공감 하트가 생긴다 . 2025.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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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75주년 특집 시리즈 2편: 피와 눈물의 전장

3년 1개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한 치열한 전투기 🔥

안녕하세요! 6.25 전쟁 75주년 특집 시리즈 두 번째 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편에서는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봤다면, 이번 편에서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간 벌어진 치열한 전투들과 그 속에서 드러난 인간의 용기와 절망을 생생하게 재현해보겠습니다.


📊 전쟁 개요: 숫자로 보는 6.25 전쟁

기간과 규모

  • 전쟁 기간: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2일, 1129일)
  • 전쟁 지역: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
  • 38도선 횡단: 양측이 각각 3회씩 넘나들며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 참혹한 인명 피해

전쟁 기간 동안 남한과 북한을 합쳐서 약 300만명 가까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군 사망자도 45,000명에 이르는 등 기간에 비해 사망자가 많다

1950년대 당시 남북한 합쳐 한반도의 인구는 3천만 명으로, 한반도 인구 중 이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만 잡아도 10% 정도. 과장을 섞자면 간신히 북한군으로부터 막아낸 지역 경상북도(지금의 대구 포함), 경상남도(지금의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포함)나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당시 이 전쟁으로 가족, 이웃, 친지, 친척을 잃지 않은 한국인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 1단계: 북한군의 남진과 낙동강 방어선 (1950.6-9)

💥 초기 3일의 재앙

서울 함락의 충격 😱 북한군은 전쟁 발발 다섯 시간도 안 되어 개성을, 3일 만에 당초 계획대로 서울을 점령했다

이는 북한의 계획이 정확히 들어맞았음을 의미합니다.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 자의 차이가 이렇게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죠.

🛡️ 한강 방어선의 붕괴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 한국군 지휘부는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었죠.

 

🏃‍♂️ 대전 전투와 딘 장군의 포로

스미스 부대의 첫 교전 ⚡ 미국 육군 주일 미 제8군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7월 1일)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B.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대전의 비극 😢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결국 제24사단장인 윌리엄 F.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물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윌리엄 딘

🛡️ 낙동강 최후 방어선

다부동 전투: 동양의 베르됭 🎯 1950년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로 진출하려던 적들의 기세를 꺾었다.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릴 정도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하다

이 시기 부산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남한 땅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였죠!


🌊 2단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1950.9-10)

🎲 맥아더의 도박: 인천상륙작전

불가능해 보였던 작전 🌊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었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이 발발한 지 4일 지난 뒤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조선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

모든 이들의 반대 ❌ 미국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구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 데다가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의 일부 인사들이 작전 성공률이 1:5,000대라고 주장하며 격심하게 반대하였으나, 맥아더는 오히려 이런 난점이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인천상륙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유엔군사령부는 인민군을 교란하기 위해 전북 군산과 경북 영덕에 양동작전을 지시했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후일 772명의 학도병에게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전우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경의를 표했습니다. 사진은 인천 앞바다에 상륙한 맥아더 사령관.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학도병 772명과 육군 장교들이 상륙함을 타고 동해안 인민군 점령지로 향했다. 그런데 그들을 먼저 맞은 것은 무시무시한 태풍이었다. 사진은 장사해안에 좌초된 상륙함 문산호.

🏆 기적적인 성공

월미도 점령 🏝️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서울 탈환의 감동 🏛️ 9월 28일 역사적인 서울 탈환이 이루어져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올랐다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한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말, 전쟁발발 97일 만에 실지를 되찾고 전전(戰前) 현상을 회복하였다

월미도 점령 직후 미군은 월미도와 인천을 연결하는 다리를 봉쇄했다
950년 9월 10일 아침 7시 폭격 상황. 미군은 함포사격으로 월미산 동쪽 사면의 인민군 진지(붉은색 선)를 포격하기 전, 함포가 닿지 않는 산 동쪽 사면(월미공원 방향)을 공격하기 위해 폭격기를 출격시켰다. 폭격기는 월미도 앞바다 팔미도 해상에 있던 함재기에서 출격하여 영종도, 작약도 상공을 선회한 뒤 급강하해 월미도 주민들의 마을(현 월미공원)에 네이팜탄 및 로켓포로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마을 주민 최소 100여 명과 진지공사에 동원되어 월미도 머무르던 인천 시민들 다수가 사망했다. 주민들은 갯벌을 건너 인천 시내로 대피했다(파란 선이 순서대로 마을 위치, 갯벌에 모여 있던 자리, 인천 시내로 향한 대피 경로).
인천항 상륙은 세 군데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미군은 15일 오전 만조 때 월미도 북쪽 해안(그린비치)에 상륙하여 섬을 장악한 후, 오후 만조 때 인천항 북쪽 해안(레드비치)과 남쪽 해안(블루비치)에 상륙했다.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월미도는 인천항 전체와 시가지까지 사정거리에 둘 수 있는 감제고지였다. ⓒ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본문


🐉 3단계: 38선 돌파와 중국군 개입 (1950.10-12)

🚀 38선 돌파의 결정

이승만의 강경론 💪 이승만은 "조선인민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맥아더의 독단 🎖️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국경지대에는 한국군만 파견하라는

1952년 화천 2군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2군단장, 이승만 대통령, 백선엽 육군참모총장, 테일러 미 8군 사령
38선 돌파 직후 기념비에 "‘아아 感激(감격)의 三八線(38선) 突破(돌파)’라고 적고 있는 김백일 1군단장
6.25전쟁에서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부대는 육군 3사단 23연대 3대대 10중대입니다. 국군의 날이 제정된 것은 1956년 9월 4일. 대통령령 제1117호. 그렇게 대한민국 국군의 날은 10월 1일 됩니다.

 

공식적으로는 3사단 23연대 3대대 10중대가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부대이지만, 9중대가 먼저라고도 하고, 심지어 1대대 1중대가 먼저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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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경고 무시

무시된 경고들 ⚠️ 중국은 유엔군의 38선 돌파에 대해 이미 여러 경로로 경고하였으나 맥아더는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설사 중국이 개입한다 하더라도 유엔군이 대승을 거둘 것이라 낙관하고 있었다

중국의 결단 🐲 그러나 중국은 10월 13일 6·25전쟁 출병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고, 10월 19일과 10월 26일 두 차례에 걸쳐 18개 사단 20만여 명의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왔다

💥 전세의 완전 역전

중공군이 대거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었다. 승리를 눈앞에 둔 유엔군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 4단계: 중국군의 반격과 혹한의 전투 (1951.1-6)

🌨️ 장진호 전투: 극한의 생존 게임

영하 40도의 지옥 🥶 장진호 전투는 6.25전쟁 중 가장 혹독한 추위 속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미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와 함께 시베리아 급 추위와도 싸워야 했습니다.

동상과 전투의 이중고 💔 많은 군인들이 총상보다는 동상으로 더 많이 쓰러졌고, 무기가 얼어붙어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빈번했습니다. 이는 현대전사에서 매우 드문 극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장진호에서 포위 당한 채 사투를 벌이고 있던 미 해병대원을 찍은 사진으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이것저것 몸을 감싸고 손에는 얼어붙은 깡통을 들고 있으나  '살아야 한다! '라는  의지에 찬 눈빛 이 인상적인 사진이다. 아래는 사진이 수록된 책인 'This is War!'에서 인용한 기록이다.

🔄 서울의 재점령과 재탈환

1.4 후퇴 😰 중국군의 대공세로 인해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해야 했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북한군과 중국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서울의 세 번째 탈환 🏆 하지만 3월 14일, 리지웨이가 지휘하는 유엔군은 '리퍼 작전'을 통해 서울을 세 번째로 탈환했습니다. 서울은 이 전쟁 동안 무려 4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승만 과 맥아더의 ‘무사안일’ 북진(北進)과 호된 대가[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대한민국 국군은 대통령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라” 이승만은 1950년 9월 30일 부산 경무대에서 군 지휘관을 소집, 비록 작전지휘권은 7월 유엔군에 넘겼지만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는 친필 명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북진 논란에 “도둑을 쫓다가 울타리가 있으니 그만두라는 격”이라고 일갈했다

💥 5단계: 교착상태와 고지전 (1951.7-1953.7)

 

🏔️ 38선 부근의 고착화

전선의 안정화 📍 1951년 초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되고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양측은 휴전회담을 개시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였다

⛰️ 치열한 고지쟁탈전

피의 언덕들 🩸

  • 백마고지 전투: 한국군 9사단의 치열한 방어전
  • 저격능선 전투: 유엔군과 중국군의 소모전
  • 펀치볼 전투: 한국군의 용맹함을 보여준 전투

이 시기 전투는 고지쟁탈전 위주라 장기간 지속되면서 병사들의 피를 말리기는 하지만 사상자는 정작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 휴전협정: 끝나지 않은 전쟁

📋 24개월 17일의 협상

길고 긴 협상 ⏰ 6.25전쟁 중에 진행되었던 휴전회담은 전쟁이 발발된 지 3년 1개월 만에, 회담이 개시된 지 24개월 17일 만에 마침내 북한군, 중공군 그리고 유엔군의 미군 대표가 각각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되었다

🚫 이승만의 강력한 반대

휴전 반대의 목소리 📢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 온 북한의 침략전쟁을 분단상태로 마감하려는 데서 한국의 통일정책이 좌절을 겪게 된 것이다. 더구나, 공산군의 점령치하에서 강제로 의용군에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되거나 또 국군 포로로 공산군에 강제 편입되었다가 다시 포로가 된 반공 포로를 공산측에 양도한다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마지막 몸부림 💪 이승만은 휴전은 일종의 자살행위이며 필요하다면 한국군만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공언하였다

 


📊 전쟁의 참혹한 피해 상황

💀 구체적인 인명 피해 통계

한국군 피해  

  • 전사: 13만 7,899명 (육군 13만 5,858명, 해군 1,903명, 공군 138명)
  • 부상자: 45만 여명
  • 실종자 포함 총 피해: 60만 9천 여명

민간인 피해의 참혹함 😢

  •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 여명
  • 학살된 민간인: 13만 여명
  • 부상: 23만 명
  • 납치: 8만 5천 여명
  •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
  • 총 민간인 피해: 100만 여명

북한의 더 큰 피해 💔

  • 북한군 사망자: 52만 명
  • 북한 민간인 사망자: 28만 2천명
  • 실종자: 79만 6천 명

🏗️ 물적 피해의 규모

남한의 피해 🏭

  • 일반 공업 시설의 40% 파괴
  • 전체 인구의 1/2 이상이 전화를 입음
  • 1952년 3월 15일까지 발생된 전재민의 수가 천만 명을 넘어섬

북한의 피해

  • 전력의 74% 파괴
  • 연료 공업 89% 파괴
  • 화학공업의 70% 파괴

부산교두보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7도선과 38도선 사이의 지역에서는 세 차례의 피탈과 탈환이 반복되었다


🔥 전쟁범죄와 민간인 학살

😱 양측의 전쟁범죄

북한군의 인민재판 ⚖️ 북한군은 처형할 때 대중을 동원한 공개 재판의 형태를 취할 때가 많았는데 이를 '인민재판'이라고 하였다. 이 '인민재판'이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에서 '마녀사냥'과 비슷한 의미로 현재까지도 흔히 쓰이고 있다

남한 지역의 학살 💔 6·25 전쟁 당시 호남 지역의 학살 피해자는 8만 4,00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학살 피해자 12만 8,936명의 65%에 이른다. 이는 극심한 좌우대립의 결과로서, 이 지역에 내재해있던 지주-소작농 갈등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민간인 학살의 비극 😢 뉴스타파가 진실화해위 보고서 전수조사를 통해 확인한 한국전쟁 당시 남한 지역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 57,882명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국군의 학살 비율(71%)가 적대세력의 학살 비율(13.8%)의 5배를 넘겼고, 학살 거의 전부가 6.25 초반 1년에 집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전쟁 영웅들과 비극적 인물들

🏆 기억해야 할 영웅들

백선엽 장군 ⭐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대공세를 막아낸 1사단장

이종찬 소령 💪 백마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지휘관

김종오 중위 🎖️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전황을 바꾼 용사

😢 비극적 인물들

윌리엄 F. 딘 소장 💔 물을 구하러 가다가 실족하여 포로가 된 미군 사단장

수많은 무명 용사들 🙏 이름도 없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젊은이들


🌍 국제적 영향과 의미

 미군의 변화

인종 통합의 계기 🤝 6·25 전쟁은 미군 내 인종 통합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1년 10월 1일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은 24연대와 같은 유색 인종 부대를 해체하고, 유색 인종 장병들은 인종 통합을 위해 백인 부대로 전출시켰다

 일본의 특수

전쟁 특수의 수혜자 💰 일본은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과 연합군의 후방 병참기지와 전쟁·보급물자 생산의 공장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여 단기간에 수십억 달러의 막대한 전쟁특수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이로써 패전 상황을 빠르게 복구하고 경제부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 다음 편 예고

3편에서는 전쟁의 유산과 교훈을 다룹니다!

  • 💔 이산가족의 아픔: 1000만 명의 비극
  • 🏗️ 전후 복구와 한강의 기적
  • 🤝 한미동맹의 탄생
  • 📚 전쟁이 남긴 문화적 유산
  • 🕊️ 75년 후, 평화 통일의 꿈
  • 🎓 6.25 전쟁이 주는 현재적 교훈

💭 마무리하며...

3년 1개월간 이어진 이 참혹한 전쟁은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하여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베트남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에 비해서도 특히나 한국전쟁은 민간인 사망자 비율이 높다. 그 대부분이 전쟁이 일어난 1950년 후반기 6개월 동안 발생했다는 점이 더욱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이 모든 희생을 통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었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3편에서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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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기를 바랍니다. 다음 편도 기대해주세요! 🕊️💙

 

2025.06.12 - [분류 전체보기] - 🕊️ 6.25 전쟁 75주년 특집 시리즈 3편: 역사의 교훈과 미래의 희망

 

🕊️ 6.25 전쟁 75주년 특집 시리즈 3편: 역사의 교훈과 미래의 희망

🕊️ 6.25 전쟁 75주년 특집 시리즈 3편: 역사의 교훈과 미래의 희망75년 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과 나아가야 할 길 🌅안녕하세요! 6.25 전쟁 75주년 특집 시리즈 마지막 편에 오신 것을 환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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