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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구석구석/생활 정치 경제

📌 반복되지 않아야 할 비극, 5·18과 계엄령의 진실

by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면 공감 하트가 생긴다 . 2025.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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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복되지 않아야 할 비극, 5·18과 계엄령의 진실

🕊️ 서론: 왜 1980년 5월의 광주는 울부짖었는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시작된 시민들의 항거는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주주의를 향한 절규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전국으로 확대된 계엄령이었죠.
도대체 왜, 계엄령은 필요하다고 주장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선택은 정당했을까요?


🏛️ 1. 유신 붕괴 후, 대한민국은 권력 공백 상태

🔻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피살

  •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암살되며 장기 독재 유신체제 종료
  • 최규하가 과도정부 수립하지만, 실질 권력은 없었음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 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했다.

🔻 12·12 군사반란으로 등장한 신군부

  •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등 신군부가 군사력으로 권력 장악
  • 정식 정부 절차를 무시한 쿠데타적 군권 탈취

신군부 ( 新 軍 部 )는  대한민국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 를 중심으로 두 차례에 걸쳐  반란 과  내란 을 일으키고  전두환 정부 를 세운 군대 내부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을 일으켰던 '구( 舊 )군부'와 구분 짓기 위해 '신(新)군부'라고 부른다.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11기와 12기 졸업생들 중심으로 조직된 군 내 사조직으로  경상도  출신 [1]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박정희 의 암묵적 비호 하에 [2] [3]  세력을 키우던 중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 하자  12.12 군사반란 을 일으키고  1980년   5.17 내란 (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으로  서울의 봄 을 짓밟고  5.18 민주화운동 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초법적 기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를 설치해 다단계  쿠데타 로  정권 을 장악했다. 1980년   8월 27일 ,  하나회 의  수장 이었던  전두환 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제11대  대통령 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 과  민주정의당 을 만들고  제5공화국 의  대통령 이 된다. 신군부 인사들은 199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 정관계의 요직 곳곳에 배치되며 영화를 누렸으나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하나회 숙청 을 통해 대부분 현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 를 통해 법정에 세워져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다.

🔻 봄처럼 퍼졌던 민주화 열기

  • 1980년 초 ‘서울의 봄’ 시기,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폭발
  • "계엄 해제", "직선제 개헌", "민정이양" 요구가 전국을 뒤흔듬

⚠️ 2. 신군부는 왜 광주에 계엄령을 적용했는가?

🔻 1980년 5월 17일, 전국 비상계엄 확대

  • 전두환 세력은 정치인, 학생 지도자 수백 명 체포
  • 국회 해산, 언론 통제, 대학 휴교령 → 민주주의 전면 중단

🔻 광주는 왜 더욱 강경 진압되었는가?

  • 전남대에서 수업 재개 요구 시위 → 군부는 강경 진압 명령
  • 광주는 유독 민주화 의식이 강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음
  • 시민들마저 시위에 동참하자, 무차별 진압 시작

🔻 ‘북한 개입 가능성’이라는 조작된 명분

  • 신군부는 “북한 연루 가능성”, “질서 유지를 위한 불가피 조치”라며 정당화 시도
  • 훗날 밝혀진 바로는 북한 개입은 근거 없는 조작된 정보였음

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는 자신들의 정권 장악을 위해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정당 및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국회를 폐쇄해버렸습니다. 또한 아무런 이유도, 영장도 없이 정치인 및 재야인사를 가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국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학생들이 모이면 자신들의 쿠데타에 대하여 반대 시위를 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저항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학생 대표자들을 검거하고 가두었습니다. 무법천지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 3. 계엄령은 정말 필요했던 조치였을까?

❌ ‘국가 안보’는 가면일 뿐

  • 실제로는 신군부가 자신들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목적
  • 시민의 기본권을 군화발로 짓밟은 결과만 남음

5.17 비상계엄 확대를 의결했던 국무위원들은 군화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했습니다. 역사를 뒤바꿔놓는 계엄확대안은 찬반 토론도 없이 불과 8분 만에 통과 됐습니다. 80년 5월17일 저녁 9시42분,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로 갑작스레 임시국무회의가 열렸고 주영복 국방장관이 북한의 동태 등을 이유로 계엄확대안을 제출 했습니다. 국무위원들은 찬반 토론을 벌이지 않은 채 8분 만에 이를 의결 했습니다. 김옥길 문교장관만이 계엄을 확대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을 밝혔을 뿐 나머지 국무위원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국무위원들은 이한빈 부총리와 박동진 외무장관, 김종환 내무장관, 김원기 재무장관, 백상기 법무장관, 정재석 상공장관, 유양수 교통장관, 이규현 문공장관, 김용휴 총무처장관, 이규호 통일원장관, 김도창 법제처장, 김재명 원호처장 등입니다. 회의장 주변에 6백 명가량의 총을 든 병력이 배치됐고 전화선이 단절되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이긴 했으나 국가대사를 결정하는 마당에 일국의 장관들이 한마디 의견도 제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 국무위원들은 사흘 뒤인 20일 소요사태의 책임을 진다며 일괄 사표를 냈습니다. 새로 임명된 각료 가운데서도 남덕우 국무총리와 신병현 부총리, 노신영 외무장관, 서정화 내무장관, 오택근 법무장관, 주영복 국방장관, 이규호 문교부장관, 이광표 문공장관 8명은 국보위 위원을 겸임하면서 신군부의 내란을 도운 혐의로 고소 고발까지 당했습니다. 5.17 혐의에 국무위원을 지낸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요즘은 검찰에 나와서 조사받는 등, 고초를 당하고 있습니다.

🔥 결국, 비극은 반복되지 말아야 했다

  • 광주는 계엄령 확대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 이는 민주주의를 무력으로 짓밟은 국가 폭력의 상징적 사건

윤석열 대통령이 긴급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 해제를 선언한 2024.1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각역 인근에 관련 내용이 담긴 호외가 놓여 있다


🧭 결론: 광주와 계엄령,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

1980년 5월, 광주는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를 보여준 현장입니다.
그 시작은, 필요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았던 계엄령 확대였습니다.


📝 요약 정리

  • 1979년: 유신 붕괴 → 권력 공백
  • 1979년 12월: 신군부의 쿠데타 (12·12 사태)
  • 1980년 5월 17일: 전국 계엄령 확대
  •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민 항쟁 시작
  • 계엄령 확대는 군부 독재 정권 수립을 위한 조작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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